쌀은 귀하다. 이 귀함을 농부는 그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다. 고된 노동의 대가이기에 한 톨의 쌀도 허투루 다룰 수 없다. 땅은 정직하여 흘린 땀만큼 고스란히 결과물을 돌려준다. 이렇게 모으고 넓혀서 만 석의 쌀을 생산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면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사람으로 알려지게 된다. 고로 만석꾼은 쌀 만 가마니를 생산할 정도의 땅을 가졌다는 것으로 부자와 부농을 의미한다.
왜 만석꾼은 부의 상징적 단어일까?
looks_one1석은 어느 정도일까? – 석은 ‘섬’에서 나온 단어로 일제강점기 가미니를 사용하기 전까지 농가에서 널리 사용했던 쌀의 수량을 계산했던 단위이다. 지금과 달리 당시 1석 기준은 144kg으로 현재 시세로 35만원 정도로 만 석으로 계산하면 35억에 달한다. 연봉 순위로 보면 0.1%에 해당한다.
looks_two얼마나 농사를 지어야 만석꾼일까? – 현재 한 마지기(200평)당 쌀 생산량은 300~350kg 정도이다. 보수적으로 2석으로 잡고 계산하면 만 석은 무려 백만 평의 땅이 필요하다. 이는 국립대전현충원의 전체 부지와 비슷하며 축구장 500개에 달하는 면적이다. 따라서 대기업 총수에 버금가는 부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looks_3역대 가장 유명했던 만석꾼은? – 경주의 최부자이다. 무려 12대, 즉 400년에 걸쳐 만석꾼을 지낸 집안이다. 만석꾼이 된 비결은 새로운 농사법인 이앙법과 성과급 제도를 도입해 생산성을 대폭 향상시켰기 때문인데, 이는 현재의 경제학적 관점에서도 놀라운 부분으로 부의 궁극적인 비법인 혁신의 원리와 지주와 소작인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상생의 진리를 일찍 파악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최부자 가문이 지금까지 존경을 받는 이유는 가진 자의 높은 도덕적 의미와 사회적 책임을 가리키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집안의 암묵적 룰을 살펴보면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백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등이 있다. 실제로 해방 후 집안 대대로 모아온 전 재산을 대학에 모두 기부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만석꾼이 가장 흔했던 지역은 평야가 한없이 이어져 하늘과 땅이 만나는 드넓은 지평선을 가졌던 김제이다. 최대 저수지로 알려진 벽골제도 김제에 있으며 전체 면적 절반이 논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역은 삼한시대부터 농경문화의 중심지로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 선생이 7할이 산지인 우리나라를 먹여 살리는 곳이라고 언급했었다. 그래서 조선 고종 때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초대형 쌀뒤주(나락이 아닌 쌀 80여 가마를 보관할 수 있음)도 만들어져 있다. 이처럼 초대형 쌀뒤주가 필요했던 이유는 오롯이 사람의 힘으로만 농사를 지어야 했기에 많은 식솔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쌀 80여 가마도 1년치가 아닌 한 달 식량으로도 부족했었다고 한다. 땅 면적으로 보면 사방 십 리(4km)가 한 집안의 땅이었다.
다만, 땅의 풍요로움을 일찍이 알아챈 탐욕스러운 지주에 의해 착취 당하고, 악랄한 일본의 의해 수탈된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당시 김제의 모든 땅은 일본인이 장악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 중에서도 하시모토로 알려진 인간은 소작인만 550명이 넘었을 정도로 최악의 악이었다.